앨범/사찰 여행

죽림정사 사찰순례

금빛여정 2014. 9. 22. 20:04

 

 

(14. 9. 22) 

 

정토회 불교대학 도반들과 사찰순례..

 

죽림정사 (竹林精舍) 백용성 조사 생가

 

전북 장수군 죽림동화댐의 맞은편에 자리한 사찰로

국가 보훈처 현충시설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백용성(1864~1940)조사의 속명은 상규, 법명은 진동, 용성은 법호..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분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가 붙잡혀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셨다고 한다.

이후 일본 불교의 침투에 맞서 전통 불교를 수호 하였으며

종단의 정화에 힘쓰며 한글로 불경을번역하고

불교 대중화에 이바지 하셨다고 한다.

 

 

 

 

 

 

 

 

 

법륜스님의 스승님이신 도문스님..

 

 

 

 

 

 

 

 

한국불교의 큰스승이자 독립운동의 주역인 용성 진동조사 오도 128주년을 맞아 봉찬대제 및 역대전등 조사 다례제..

 

 

 

 

 

 

 

 

 

 

 

 

 

 

 

 

 

 

 

 

 

 

 

 

 

 

 

 

 

 

 

 

 

 

 

 

 

 

 

 

 

 

 

 

 

 

 

 

 

 

 

 

 

 

 

 

 

 

 

 

 

 

 

 

 

 

도문스님의 스승님이며, 법륜스님의 할아버지 스승님이신 용성조사..

 



1864년 전북 장수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난 용성 조사의 탄생 150주년은 한국과 불교계에 남다른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용성 조사는 조선 500년간 불교가 탄압받으면서 산중에 숨고, 민간신앙 속에 묻혀 부처님 근본 가르침을 잃고 사회지도력을

상실한 시대에 계율을 정비하고 정법을 확립했다. 불교 지성화와 경전 번역, 도심포교, 어린이법회 등 불교 대중화와 농사지으며

참선하는 선농일치를 주창하고 실천했다.

용성 조사는 서울 종로에 ‘대각교당’을 세워 절에 오르간을 놓고 찬불가를 만들어 부르는 등 어린이법회에도 열정적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도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용성 조사다. 만주 북간도에 대각교당과 선농당을 건설, 방황하는 동포들의 정착을 돕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해 여기서 나오는 자금을 꾸준히 독립운동에 지원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를 상해의 백범 김구에게 보낸 것도 용성조사였다.

훗날 해방이 되자 김구 일행은 용성 조사를 찾아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대사는 용이 되고 용성조사께서는 체가 되어

기미년 3·1독립운동의 막후 기둥이 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어 바로 삼장역회를 조직하여서

20여종의 경전번역과 20여종의 어록을 저술하셨던 것입니다.

국내에는 함양 화과원을 이룩하고 국외로는 중국 만주 연길현에 선농당을 이룩하고

용정에 대각사 포교원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충청남도 예산 출신 윤봉길 의사는 용성조사님을 뵈옵고 그 지도에 의하여
중국 만주 용정 대각사를 거쳐서 용성조사님의 소개로 상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를 찾아

범 김구 선생님을 만나 용성조사님의 천거한 뜻을 말하고 용성조사님의 가르치심대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에 골돌하셨던 것입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님이 25세시 서기1932년 4월 26일에 김구 선생님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에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소위 천장절기념 및 전승축하 기념식전에 폭탄를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장군 및 고관들에게 열린 소위 천장절기념 및 전승축하 기념 식전에 폭탄을 던져

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장군 및 고관들에게 천주(天誅)를 가하였던 것입니다.

일본군부에 폭탄살해를 당한 중국 동북군 총사령관 장작림 장군의 아들 장항량 장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군 총사령관이 되어서 동북군을 이끌고 장개석 국민군의 소속이 되어 장개석
의 부하장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항량 장군의 심혈을 다한 노력으로 국공합장
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상해 홍구공원사건 이후 윤봉길 의사는 대한의 남아 조선의 청년
으로 호칭되고 존경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용성조사님께서는 장개석총통과 모택동주석을

각각 만나 대한의 남아 조선의 청년 윤봉길 의사 하나도 무서운데, 나 백용성이 일만명의

윤봉길의사를 만들 것이니 국부군과 공산군에서 각각 10만 대병을 그리고 제2의 윤봉길로서,

조국광복과 중국에서 일본군을 몰아낼 것을 합의하고 돌아오셨던 것입니다.

이 운동을 진행하고져 만반 준비 중에 안모를 중국 만주 대각사 선농당 관리장으로 파견하여

1만명 대한의 남아·조선의 청년 제2윤봉길의사를 만드는 작업의 만주 총책임자로 하여

파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모 그가 용성조사님의 상좌의 탈을 썼으나 헌병대 일본경찰 밀정이라 이 구국운동을

일망타진해 버렸던 것입니다. 이때가 대각응세 기묘년 서기 1930년도 이었습니다.

하모 제자는 용성조사님에게 등을 돌려 다른 승려의 제자가 되어 용성조사님 심정에

큰 상처를 주었고, 윤모제자는 용성조사님 면전에서는 복종하느체 하나 뒤에서는 전을 부리며

점잖은 행동으로 눈가림을 했고, 뇌묵이라는 상좌는 일본유학을 보냈는데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밀정이 되어서 용성조사님을 직접 협박하여 대각교 간판을 내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용성대종사님이 한탄하여 말씀하시되 상좌와 제자가 배반하고 동지가 배신하며 국민을

씨개명으로 유도하려는 기미가 보임을 보시고 자탄하되 “자치가 자치를 잡아먹는구나.

에서 녹이 슬어 상하는구나. 사자뱃 속에서 충이 생기어 쓰러지는구나.”하시면서 그 수법제자

석가여래부촉법 제69세 동헌완규대선사에게 유훈10사목을 부촉하시고 대각응세 경진년
음력 2월 24일 세수77세 법랍61하를 일기로 입적하시면서 임종게를 남기시니 이와 같습니다.

諸行之無常 萬法之俱寂 匏花穿籬出 閑臥麻田上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로 한가로이 누었도다

라 임종게를 읊으시고 나서

“시자여 대중이여 그 동안 수고했도다 나는 간다”
라는 말씀을 남기고 입적하셨습니다

Memory / 리차드 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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