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호승님의 시 9

수선화에게/정호승

수선화에게/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곡 - 첫 발자욱

손에 대한 예의..

손에 대한 예의 / 정호승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들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 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 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정호승/"..

바닥에 대하여...

바닥에 대하여..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은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바닥과 싸우며 살아간다. 각기 처한 세계와 삶의 바닥이 다 다르므로, 누구도 다른 사람의 바닥에 관해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닥에서 어떻게 일어설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래 이야기 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