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추천시

가을편지/이혜인

금빛여정 2013. 11. 8. 10:22

가을 편지 1 ...이 해인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 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 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가을 편지 2 ...이 해인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읍니다
사과씨만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읍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읍니다

기쁠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 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 둡니다

이 가 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게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가을 편지 3 ...이 해인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읍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 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빛 바랜 시집 책 갈피에
숨어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읍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 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가을 편지 4 ...이 해인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小心症) 환자(患者)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詩)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 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나무가 미련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 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 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 주셨읍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 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日常)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 는 것을.

가을 편지 5 ...이 해인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읍니다.

솦 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읍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읍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때
아무도 그의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와해 본 적이 있읍니까

지는 잎처럼
그의 삶이 또한
잊혀져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와 해 본 적이 있읍니까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마지막으로 아껴 두 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의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햇던
당신과 나의 시간 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Forest Hymn(숲을 노래하는) / 빌 더글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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